창문형이든 벽걸이든, 원룸에 원래 달려 있던 에어컨이 여름 한복판에 멈추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설정 온도를 18도까지 내려도 미지근한 바람만 나오는데, 집주인에게 연락하면 에어컨에 서비스센터 번호가 붙어 있으니 직접 불러 보라는 답이 돌아오곤 합니다.
이때 두 가지 질문이 자주 섞입니다. 수리비를 누가 내느냐는 문제와, 지금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둘은 다른 질문이고, 순서를 잘못 잡으면 책임이 임대인에게 있는 사안에서도 임차인이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판단 기준과 실제로 밟아야 할 순서를 나눠서 짚어보겠습니다.
![]() |
| 원룸 벽걸이 에어컨 앞에서 휴대전화로 관련 문의 메시지를 작성하는 모습. |
출발점은 그 에어컨이 계약에 들어와 있는지 여부
임대인의 수선의무는 임대차 목적물에 관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첫 확인은 법 조문이 아니라 내 계약서입니다. 계약서 본문이나 특약,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에 에어컨이 옵션으로 적혀 있는지 먼저 보셔야 합니다.
법무부가 국토교통부 등과 함께 만든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는 이 확인을 계약 단계에서 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제3조에서 입주 전 수리가 필요한 시설물과 비용 부담, 수리 완료 시기를 적도록 하고, 제4조에서 임대인이 계약 존속 중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계약할 때 비워두고 넘어가기 쉬운 칸인데, 분쟁이 생기면 가장 먼저 펼쳐보게 되는 칸이기도 합니다.
계약서 어디에도 언급이 없고 전 세입자가 두고 간 물건을 그대로 쓰는 상황이라면, 그 에어컨을 목적물의 일부로 볼 수 있는지부터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때는 결론이 하나로 정해져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입주 당시 어떤 설명을 들었는지 같은 사정이 함께 따져질 여지가 있습니다.
법원이 보는 기준은 고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살 수 있느냐
흔한 오해가 하나 있습니다. 수리비 금액이 기준이라는 생각입니다. 판례가 보는 지점은 조금 다릅니다.
대법원 생활법률 자료 「임대차 목적물의 하자, 누가 수선해야 할까?」에 따르면, 대법원은 임차인이 별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고칠 수 있을 정도의 사소한 고장이라면 임대인이 수선의무를 지지 않지만, 수선하지 않으면 계약에서 정한 목적대로 사용·수익할 수 없는 정도라면 임대인이 수선의무를 진다고 판시해 왔습니다(대법원 2010다89876, 89883 판결). 금액이 아니라 그 고장 때문에 집을 집답게 쓸 수 없게 되는지가 갈림길인 셈입니다.
같은 자료에서 대법원은 그 판단이 목적물의 종류와 용도, 파손의 규모와 부위, 사용·수익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 수선이 쉬운지와 드는 비용, 계약 당시 목적물의 상태, 차임의 액수 같은 사정을 함께 참작해 사회통념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설명합니다(대법원 2011다107405 판결). 폭염 기간의 냉방 정지가 어느 쪽에 놓이는지는 이 요소들을 놓고 사안별로 판단될 사항입니다.
수리는 임차인 부담이라는 특약이 있어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원룸 계약서에는 시설물 수리는 임차인이 부담한다는 취지의 특약이 자주 들어갑니다. 이 문구를 보고 포기하는 분이 많은데, 판례는 그 효력 범위를 한정해서 봅니다.
앞의 대법원 자료는 특약으로 임차인에게 넘어가는 것이 통상 생길 수 있는 파손의 수선 등 소규모 수선에 한하고, 대파손의 수리나 건물 주요 구성부분에 대한 대수선, 기본적 설비부분의 교체 같은 대규모 수선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아 여전히 임대인이 부담한다고 설명합니다(대법원 94다34708 판결).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도 비슷한 선을 예시로 듭니다. 난방, 상하수도, 전기시설처럼 주택의 주요 설비가 노후·불량해서 생긴 수선은 임대인 부담으로, 임차인의 고의·과실로 인한 파손이나 전구 교체 같은 통상의 간단한 수선, 소모품 교체는 임차인 부담으로 적어 두고 있습니다.
다만 이 예시에 에어컨이 이름으로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필터 청소처럼 관리에 가까운 일과 압축기 고장처럼 기기를 못 쓰게 되는 일이 같은 줄에 놓이는 오해가 생깁니다. 실제 분쟁이 벌어지는 자리도 대체로 여기입니다.
연락하기 전에, 알리는 방식부터 정리하세요
민법은 임차물에 수리가 필요하면 임차인이 지체 없이 임대인에게 알리도록 정하고 있습니다(민법 제634조). 통지 의무가 임차인 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더워서 참다가 몇 주 뒤에 말하면, 통지가 늦어 손해가 커진 부분을 두고 다시 다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알리는 방식도 결과를 바꿉니다. 전화 통화만으로 끝내면 남는 기록이 없으니, 통화 뒤에 문자나 메신저로 한 번 더 정리해 보내는 편이 안전합니다.
내용은 길 필요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어떤 증상인지, 설정 온도와 실내 온도가 몇 도인지, 필터 청소나 전원 재부팅처럼 임차인이 할 수 있는 조치는 해봤는지, 수리 기사 방문이 가능한 시간대는 언제인지면 충분합니다. 마지막 항목이 의외로 중요합니다. 혼자 사는 집은 문을 열어줄 사람이 나뿐이라, 일정이 안 맞아 수리가 밀리는 동안 책임 소재가 흐려지기 쉽습니다.
집주인이 움직이지 않을 때 밟는 순서
통지에도 반응이 없다면 상당한 기간을 정해 서면으로 수선을 요청합니다. 문자로도 가능하고, 계속 회피하면 내용증명을 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상당한 기간이 며칠인지는 법에 숫자로 적혀 있지 않습니다. 앞서 본 판단 요소를 보면 계절이나 용도가 고려될 여지는 있지만, 며칠이면 충분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이행되지 않으면 선택지가 남아 있습니다. 대법원 생활법률 안내는 임대인이 수선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임차인이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고, 자신의 비용으로 먼저 수리를 받은 다음 그 비용을 청구하거나 지급할 차임에서 공제할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민법 제626조).
그다음 단계가 조정입니다. 주택임대차 분쟁은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토지주택공사, 한국부동산원이 운영하는 주택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할 수 있고, 수선의무에 관한 분쟁도 대상에 포함됩니다. 안내상 수수료는 조정 목적의 값에 따라 정해지고 소액임차인 등 면제 대상도 있습니다. 금액과 면제 요건, 관할은 신청 직전에 위원회 공식 안내에서 확인하시는 편이 좋습니다.
월세를 안 내는 것과 차임에서 공제하는 것은 다릅니다
여기가 실제로 가장 많이 미끄러지는 지점입니다. 앞 문단의 공제를 월세를 안 내도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공제는 임대인의 수선의무가 인정되는 상황에서 실제로 지출한 비용을 근거와 금액을 갖춰 통지하고 그만큼을 차임에서 빼는 계산입니다. 미납은 그냥 안 내는 것입니다. 통장에서 돈이 안 나간다는 점만 같아 보일 뿐, 뒤에 남는 기록이 전혀 다릅니다.
차임 연체가 일정 기간에 이르면 임대인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규정도 민법에 있습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 월세부터 멈추면, 수선의무 다툼에서는 유리했을 사람이 계약 해지 문제로 끌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혼자 사는 집이라면 이 기록부터 챙기세요
- 계약서에서 에어컨이 옵션으로 기재된 부분과 수리 관련 특약 문구를 사진으로 남겨 둡니다.
- 입주 당시 정상 작동을 확인한 기록이 있으면 함께 보관하고, 없다면 지금 상태라도 영상으로 남깁니다.
- 고장 통지는 문자나 메신저로 하고 화면을 캡처해 둡니다. 수리 기사 방문이 가능한 요일과 시간대도 함께 적습니다.
- 기사에게 고장 원인에 대한 소견과 견적서를 서면으로 받아 둡니다.
- 임차인이 먼저 지출했다면 영수증과 결제 내역 원본을 보관합니다.
- 조정을 신청할 상황이면 위원회 공식 안내에서 관할과 수수료를 먼저 확인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집주인이 에어컨은 서비스로 놔둔 거라 책임 없다고 하는데 맞나요
계약서에 옵션으로 기재돼 있다면 그 주장만으로 책임이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임대인의 수선의무는 임대차 목적물에 관한 의무이고, 무엇이 목적물에 포함되는지는 계약서 기재와 계약 당시 사정으로 판단됩니다. 반대로 계약서에 아무 언급이 없고 전 세입자가 두고 간 물건이라면 다툼의 여지가 커지므로, 계약서와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부터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터 청소나 냉매 충전도 집주인이 해줘야 하나요
필터 청소처럼 임차인이 별 비용 없이 손쉽게 할 수 있는 관리는 임차인 몫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도 전구 교체 같은 통상의 간단한 수선과 소모품 교체를 임차인 부담 예시로 들고 있습니다. 다만 냉매가 새서 반복 충전해야 하는 상태라면 단순 소모가 아니라 기기 고장에 가까울 수 있어, 수리 기사의 진단 내용을 서면으로 받아 두는 편이 좋습니다.
계약서에 수리는 임차인 부담이라고 적혀 있으면 끝인가요
그 문구만으로 모든 수선이 임차인에게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대법원은 특약으로 임차인이 부담하게 되는 범위는 통상 생길 수 있는 파손의 수선 등 소규모 수선에 한하고, 대파손의 수리나 기본적 설비부분의 교체 같은 대규모 수선은 여전히 임대인이 부담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번 고장이 어느 쪽인지를 진단서와 견적서로 특정하는 것이 실익이 있습니다.
제가 먼저 수리하고 나중에 청구해도 되나요
가능하지만 조건이 붙습니다. 임대인의 수선의무가 인정되는 사안이어야 하고, 사전에 통지하고 상당한 기간을 준 기록이 남아 있어야 다툼이 줄어듭니다. 통지 없이 임의로 상위 기종으로 교체한 뒤 전액을 청구하면 필요한 비용의 범위를 두고 다시 분쟁이 생길 수 있으므로, 수리 전에 견적을 공유하고 회신을 기다린 기록을 남기시는 편이 안전합니다.
에어컨이 안 되는 동안 월세를 그만큼 깎아도 되나요
임의로 깎아서 내는 방식은 권하기 어렵습니다. 대법원 안내가 말하는 것은 실제 지출한 수리비를 차임에서 공제하는 계산이지, 불편한 만큼 알아서 감액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임 연체가 쌓이면 계약 해지 사유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감액이 필요하다면 임대인과 서면으로 합의하거나 조정 절차를 거치는 편이 안전합니다.
오늘 저녁에 할 수 있는 세 가지
지금 에어컨이 멈춰 있다면 오늘 할 일은 세 가지입니다. 계약서에서 에어컨 관련 기재와 특약을 찾아 사진으로 남기고, 증상과 방문 가능 시간대를 적어 문자로 통지하고, 수리 기사에게 원인 소견을 서면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그다음 선택지는 전부 열려 있습니다. 반대로 전화로만 말하고 참다가 월세를 멈추는 순서로 가면, 원래 유리했을 사안도 복잡해집니다. 더운 날일수록 감정보다 기록이 먼저입니다.
이 글은 공개된 법령 해설과 공공기관 안내를 정리한 것이며 개별 사건의 결론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계약서 문구와 고장 원인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금액이 크거나 분쟁이 길어질 것 같으면 무료 법률상담이나 조정 절차를 함께 활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댓글